[秘錄환경운동25년]상봉동 진폐증 사건

가시넝쿨 속에서 핀 검은 민들레
진폐증에 걸린 뒤 투사로 변신한 박길래씨… 공해병 환경소송의 이정표 세워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박길래씨는 스스로 환경운동가로 나섰다. 1990년 4월 22일 지구의 날 행사에 참석, ‘내 폐를 돌려다오!!!’ 라고 쓴 피킷을 들고 있는 박씨.

들레 들레 민들레야
상봉동의 민들레야
필 적에는 곱더니만
질 적에는 까맣구나

-안혜경 노래 ‘검은 민들레’ 중에서

박길래씨가 그토록 갖고 싶었던 집을 장만해 서울 상봉동에 들어간 것은 1979년 4월이었다. 그때 나이 36세였다. 대전에서 태어나 일찍 부모를 여의고 작은아버지 집에서 자란 그녀는 가난이 싫었다. 그래서 16세 때 무작정 상경했고 행상, 여공, 미용사, 가게점원, 식당종업원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이렇게 억척스럽게 돈을 모은 덕에 20년 만에 ‘내 집’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런데 혼기를 놓치면서까지 노력해서 이룬 꿈의 보금자리가 죽음의 문턱일 줄이야. 1982년부터 까닭 없이 피곤을 느끼고 감기가 잦아졌다. 증세가 심해져 기침과 통증 때문에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종합검진을 받아보았다. 폐결핵 2기라는 진단이 나왔다. 하지만 약을 먹어도 낫지 않았다.

주택가 양품점 주인의 ‘폐결핵’

박씨의 병명이 제대로 밝혀진 것은 1986년 11월이었다. 국립의료원에서 폐조직 검사를 받아본 결과 탄분침착증, 즉 진폐증으로 확인된 것이다. 진폐증은 광산근로자의 직업병으로 알려져 있었고, 치료약이 없는 불치병이었다. 주택가에 살면서 양품점을 운영하던 여성이 이런 병에 걸릴 수 있다는 사실은 사회적으로 큰 충격이었다.

하지만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1년이나 지나서였다. 진폐증 판정 후 박씨는 강원도에서 약 1년간 요양하고 서울로 돌아와 다시 병원에 다녔다. 이때 박씨의 임상사례가 보건전문지에 1단짜리 기사로 났는데, 조선일보 사회부 최구식 기자(현 한나라당 의원)가 이를 포착해 1988년 1월 21일자 사회면 톱으로 보도한 것이다.
‘연탄공장 부근 탄가루 공해, 주민 진폐증 첫 발견’

환경운동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사건’의 출발점이 된 이 기사로 최 기자는 사내 1급 특종상을 받고, 산재·공해병 전문기자 대접을 받을 정도로 이 분야에서 맹활약했다. 그렇게 된 데는 그의 날카로운 기자적 감각이 작용한 점도 있지만 기사 속의 뜻하지 않은 오류가 도리어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한 덕도 있다. 다음은 최 기자가 쓴 기사의 일부다.

“20일 국립의료원 흉곽내과(과장 김재원)에 따르면 최근 서울 동대문구 상봉동 S연탄 공장 부근에 8년 동안 거주했던 주부 서모씨(34)에 대한 정밀검사 결과 서씨가 진폐증에 걸린 것으로 확인….”

뜻하지 않은 오류란 환자가 뒤바뀐 것이다. 진폐증에 걸린 환자는 45세의 박씨인데 진료기록에는 34세의 서명화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박씨는 투병생활을 하느라 집 두 채 값을 날리고 종로구 신영동의 쪽방에 세 들어 있었다. 병원비를 감당할 수 없었던 그녀는 이웃에 사는 서씨의 의료보험카드를 빌려서 국립의료원에서 치료를 받아온 것이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최 기자는 정면돌파를 선택했다. 박씨를 직접 만나 취재를 한 뒤 조영래 변호사(1990년 작고)를 찾아갔다. 환경운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상봉동 진폐증 사건 소송’은 이렇게 시작됐고, 최 기자는 1월 24일자 사회면 톱으로 다시 한 번 이 사실을 보도했다.

상봉동 진폐증 소송과 역학조사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전문가그룹. 왼쪽부터 조영래·윤종현·박석운·임현술·김정욱.

‘원고 박길래(일명 서명화)’

조 변호사는 ‘준비된’ 환경소송 전문 변호사였다. 동생 조중래(현 명지대 교통공학과 교수)의 반공해활동을 격려·지원했고, ‘공해소송에 있어서 인과관계 입증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으로 석사논문을 쓴 경력이 있었다. 온산병 사태 때는 소송을 염두에 두고 직접 현장조사에 나섰으며, 한국공해문제연구소(이하 공문연)의 이사로도 참여했다.

최 기자가 박길래씨와 함께 서소문동 명지빌딩에 있는 조 변호사의 사무실을 찾은 것은 토요일인 1월 23일이었다. 조 변호사는 그 자리에서 무료변론에 나서기로 하고 사무실 인력을 풀가동했다. 윤종현 변호사(현 법무법인에이스 대표변호사)와 공동으로 소송대리인이 되어 그날로 소장을 작성해 접수했다.

그런데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박길래씨가 원고가 돼야 하는데 진폐증 환자라는 법적인 근거가 없었다. 진단서나 진료기록에 환자는 서명화로 돼 있었고, 그렇다고 원고를 서명화로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당시 조 변호사가 운영하던 시민공익법률상담소의 상담역 박석운(현 전국민중연대 집행위원장)의 기억에 따르면….

“박길래씨가 명의를 빌린 바람에 ‘조선일보’가 난처한 입장에 빠져 우리에게 온 것이다. 그때 ‘조선일보’가 망원동 수재 소송을 취재하고 있어서 조 변호사를 잘 알고 있었다. 소장을 쓸 때는 내가 원고를 박길래로 하고 괄호해서 ‘일명 서명화’를 넣자고 했다. 그래서 ‘쿨’하게 정리됐다.”

실제로 소장에는 ‘원고 박길래(일명 서명화)’라고 표기하고, 청구원인란에 “원고는 본명이 박길래이나 피고측의 불법행위로 인한 이 건 질병에 걸린 후 생활형편상 도저히 치료비를 감당할 수 없어서 이웃에 사는 소외 서명화의 의료보험카드를 일시적으로 빌려서 사용한 바 있음”이라고 덧붙였다(보험증을 ‘불법대여’한 서씨측은 박씨의 치료비 42만 원을 의료보험조합에 물어냈고, 보험증 사용도 3개월간 정지당했다).

조 변호사는 한술 더 떠 소송구조신청서도 함께 제출했다. 소송구조란 경제적 약자에게 인지대 등 소송에 필요한 비용을 법원이 대신 내주는 제도다. 하지만 조문만 마련돼 있을 뿐 이용하는 사례가 거의 없었다. 조 변호사는 법전 속에 잠자고 있는 이 사법제도를 찾아내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다음은 조 변호사가 내세운 소송구조 신청이유의 일부.

“신청인의 재산이라고는 시가 약 3000만 원짜리 집 한 채가 있을 뿐 달리 재산이 없습니다. 그런데 신청인은 그 가옥을 그 동안 약 4년간에 걸친 치료비 및 생활비에 충당하기 위하여 은행에 담보로 잡히고 1000만 원을 대출받은 외에도 두 세대에게 전세보증금 약 1600만 원과 300만 원에 전세를 내어주고 신청인 자신은 현재 월세 5만 원짜리 단칸방에 살고 있는 처지이며, 위 은행융자금 및 전세보증금조차도 그 동안의 치료비와 생활비 등으로 거의 다 써버린 상태입니다.”

법원은 사상 최초로 조 변호사가 활용한 소송구조 신청을 받아들이는데, 이는 그 후 공해소송에 있어서 소송구조 제도의 활용 가능성을 확대시킨 단초가 됐다(안경환, 조영래 평전, 도서출판 강, 2006년).

‘상봉동 진폐증 소송’은 국내에서 처음으로 법원에 의해 공해병이 인정된 사례로 꼽히지만 소송이 순조롭게 진행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1심 판결이 나오기까지 약 1년 동안 14차례의 재판이 열려 치열한 법정공방이 벌어졌다. 공해소송의 핵심은 인과관계를 규명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박길래씨가 피고인 (주)강원산업의 상봉동지점 삼표연탄 망우공장의 탄가루에 의해 진폐증이 걸렸다는 점이 입증돼야 하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볼 때 간단한 것 같지만 소송에는 상대가 있는 이상 쉬운 일이 아니다. 조 변호사와 함께 소송을 진행했던 윤종현 변호사의 최근 회고에 따르면….

“우리가 보기에는 증거가 뚜렷했다. 병명 자체가 인과관계를 부인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공해소송에서 인과관계를 입증하기는 매우 어렵다. 개연성이론(가해자가 책임이 없음을 입증하지 못하면 피해자의 주장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법이론)이 있긴 하지만 워낙 전문적인 영역이고 정확하게 판단해주는 전문가를 구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박길래씨의 경우도 탄분침착증이라는 피해와 탄가루라는 분명한 원인이 있었지만 ‘그렇다면 왜 이 사람뿐이냐’고 해서….”

이 대목에서 등장하는 전문가 집단이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이하 인의협)다. 양길승(현 녹색병원 원장) 등에 의해 1987년 11월 창립된 인의협의 첫 주요 활동이 상봉동 진폐증 역학조사였다. 인의협은 상봉동 진폐증 사건을 비롯해 뒤이어 터진 문송면군 사건, 원진레이온 사건 등에 참여하면서 이 무렵 싹튼 보건의료운동을 주도하게 되는데, 그 중심에 양길승이 있었다. 그는 “(상봉동 진폐증 사건은) 내가 직접 관여한 게 아니고 최열이 부탁을 해서 연결해준 것”이라고 최근 회고했다.

인의협은 ‘진폐증 조사 소위원회’를 구성, 첫 공판이 열린 직후인 1988년 2월 26일부터 주민 검진을 시작했다. 소위 위원장은 소래사천연합의원 내과전문의인 안용태(현 서울 구로동 안용태내과 원장)였고, 정해관(현 성균관대 의대 교수)·임현술(현 동국대 의대 교수) 등 뒷날 환경의학에 크게 기여하는 많은 젊은 의사들이 소위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정해관에 따르면 이 시기에는 공해병이나 직업병이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고 연구도 잘 이뤄지지 않았다. 의학계에서 산업의학과 환경의학이 분화되지 않은 단계였다는 게 그의 말이다. 다음은 그가 전하는 당시 상황.

“계기를 찾는다면 1987년 발생한 성광조명사건을 들 수 있다. 성남 별표형광등 공장에서 수은중독 환자가 발생한 것이다. 이걸 학술적으로 정리하는 과정에 관심을 가지는 의사들이 있었다. 이런 참에 상봉동 진폐증 소송이 이뤄지고 의사를 필요로 하는 상황이 생기자 몇몇 관심 있는 의사들이 참여하게 된 것이다.”

병상에서 투병하는 박길래씨(왼쪽)와 직계가족이 없는 박씨를 가족처럼 돌본 신영식·오진희 부부.

죽은 헌법을 현실에 살려놓다

당시 분진 직업병이 작업장 밖에서 발생한 사례는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았다. 이스라엘 사막의 유목민인 베두인족 여인에게서 모래바람에 의한 진폐증이 발견된 것이 학계에 보고된 대표적인 사례였다. 인의협 소위에 참여한 젊은 의사들로서는 상봉동 역학조사는 새로운 도전이었다.

소위의 역학조사는 박길래씨에게 진폐증을 유발한 것으로 추정되는 삼표연탄 공장의 반경 1㎞ 이내에 있는 상봉 1·2동 주민 가운데 5년 이상 계속 거주한 2095명을 대상으로 약 3개월 동안 실시됐다. 그 결과 박씨 외에 2명의 진폐증 환자와 3명의 의사진폐증 환자를 확인했다. 새로 확인된 환자 5명 중 3명은 박씨처럼 연탄공장이나 탄광에 근무한 경력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를 근거로 조사팀은 서울시가 시내 17개 저탄장 주변 주민 1842명을 대상으로 1988년 6월 25일부터 7월 14일까지 실시한 2차 역학조사에도 참여, 8명의 진폐증 환자와 14명의 의사진폐증 환자를 추가로 발견했다.

인과관계 외에도 뜨거운 법정 논쟁거리가 된 것이 ‘수인한도론’이다. 즉 인간이 사회공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어느 정도까지는 참아야 하는 범위가 있다는 것이다. 피고 측은 석탄 자원의 효율적 이용과 국민 연료생활의 향상에 이바지해온 공익적 성격이 있는 점, 그리고 연탄공장이 1957년 먼저 들어서고 그 뒤에 인근 주거지가 형성된 점 등을 감안할 때 주민들이 석탄가루 방산에 대해 어느 정도는 ‘수인할 의무(참아야 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조영래·윤종현 변호사는 과거 공해소송에서 위법성을 판단하는 지배적인 이론으로 삼았던 수인한도론을 새로운 법논리로 반박했다. 세계적으로 환경권의 개념이 확립되면서 수인한도론에 대한 심각한 반성과 비판이 일고 있는 데다 우리 헌법도 환경권을 보장하고 있는 만큼 수인한도라는 개념은 허용될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이에 대해 ‘조영래 평전’의 저자인 안경환 서울대 법대 교수는 “여태껏 이름뿐인 장식물에 머물렀던 환경권을 정면으로 끌어내 헌법을 현실 속에 살아 움직이는 일상규범으로 만드는 데 기여한 공적이 크다”고 평가했다

1989년 1월 12일 서울민사지법 합의13부(재판장 서정우 부장판사)는 “강원산업은 박씨에게 손해배상금 1000만 원을 지급하라”고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위법성은 물론 인과관계까지 부정한 피고 측의 주장 대신 원고 측의 반대논리를 재판부가 받아들인 결과였다. 이 판결은 고등법원을 거쳐 대법원에서도 그대로 확정, 국내 환경소송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사법부가 환경문제로 인한 재산피해가 아닌 신체피해를 인정한 첫 사례로 기록된 것이다.

‘상봉동 진폐증 사건’은 공해병에 대한 국내 환경운동의 첫 승리이기도 했다. 박길래씨의 소송 제기, 인의협 의사진의 역학조사, 법원의 판결, 박씨의 죽음 등 이 사건의 처음과 끝이 반공해운동권의 적극적인 개입 속에서 이뤄졌기 때문이다.

상봉동 진폐증 사건을 담당했던 반공해운동권의 활동가들. 왼쪽부터 윤지선·남미경·박상철·조수자·황순원.

재판은 이겼지만 남은 건 빚더미

최열(현 환경재단 대표) 등 반공해운동권이 이 사건에 뛰어든 것은 박씨가 진폐증 판정을 받은 1986년 11월에서 소송을 제기한 1988년 1월 사이로 추정된다. 공해반대시민운동협의회(공민협) 간사였던 윤지선(현 성남환경운동연합 운영위원)에 따르면 1987년 말쯤 공민협의 공해고발전화를 통해 박씨의 진폐증이 반공해운동권에 알려졌다.

공해추방운동연합(이하 공추련)이 출범하기 전에 표면화된 이 사건은 공민협의 남미경(생태안내자, 전 성남환경운동연합 사무차장), 공해추방운동청년협의회(이하 공청협)의 박상철(공인회계사, 현 환경운동연합 감사) 등 청년그룹의 헌신적인 활동에 의해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환경운동사에서 이 사건이 의미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박길래씨의 의지가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진폐증 판정은 박씨에게는 ‘사형선고’였다. 사람은 시한부 인생이 되면 대체로 두 가지 중 하나의 행동유형을 보인다. 여생을 의미 있게 살기 위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신하거나 절망해서 자포자기하거나. 박씨는 이 가운데 전자를 선택했다. 남미경의 기억을 더듬으면….

“박길래씨는 키가 작아도 미인이었고, 당차고 똑똑했다. 일할 때는 매우 열정적이었다. 아픈 몸으로 행사에 참여하고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그래서 우리도 더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공해소송이 벌어지면 기업은 사력을 다할 수밖에 없다. 패소하면 대규모 배상은 물론 자칫 문을 닫는 상황으로까지 치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반공해운동권이 발표한 성명서 등을 보면 박길래씨도 피고 기업으로부터 온갖 회유·협박·음해에 시달린 것으로 되어 있다. 처음에는 상봉동 주민들조차 ‘집값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대응에 소극적이었을 정도다. 박씨가 이런 악조건을 딛고 환경운동가로 변신한 것은 놀라운 일었다. 다음은 최열의 최근 회고.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한열의 어머니 등처럼 아들이나 가족의 죽음을 계기로 운동에 뛰어드는 경우는 많지만 박길래씨처럼 자기가 당한 경우는 대개가 자포자기하게 된다. 그런데 박씨는 자기와 같은 사람이 또 나와서는 안 된다며 초인적인 의지를 발휘했다. 자기가 처한 현실을 아주 정확하게 말했고,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분노하게 만들었다. 자신이 나아야겠다는 의지도 굉장히 강했다.”

박길래씨는 생전의 여러 인터뷰와 일기 등을 통해 “진폐증이란 것을 알고 몸이 너무 약해지고 치료비 과다 지출로 돈도 없는 데다 기업을 상대로 싸울 엄두가 나지 않았다”며 “공추련 활동가 등 도와주는 분이 많아 힘을 얻었다”고 밝힌 바 있다. 박씨는 일기에서 “오늘은 피곤해서 일기도 못 쓰겠다”는 표현을 자주 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된 상황에서도 거의 매일 일기를 썼다.

상봉동 진폐증 사건은 1987년 대선 후 운동권이 분열된 속에서 반공해운동권을 하나로 묶는 계기를 제공하기도 했다. 공민협·공청협이 공동활동을 펼침으로써 공추련으로 통합하는 밑거름이 됐고, 환경과공해연구회(이하 환공연) 탄생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환공연의 전신인 공해연구회는 반공해운동을 뒷받침할 전문성 확보를 표방했는데, 황순원(전 환공연 부회장)·이수경(현 환공연 사무처장) 등이 이 사건을 담당하면서 김정욱 교수(서울대 환경대학원) 등 전문가 그룹의 활동을 뒷받침했다. 안병옥(현 시민환경연구소 부소장)은 “이 무렵 공추련의 운동성과 환공연의 전문성 간의 역할 분담과 공조가 잘 이뤄졌다”고 최근 회고했다.

일명 ‘박길래 사건’으로도 표현되는 상봉동 진폐증 사건은 환경운동사에는 ‘개가’로 기록되지만 박길래씨 개인에게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법원이 인정한 박씨의 신체기능장해로 인한 수익 상실률은 11%였다. 9100만 원의 청구액 중 1000만 원만 받은 것이다. 즉 법원에 의해 공해병을 처음으로 인정받은 상징적 의미만 있을 뿐 실질적인 배상은 이뤄지지 않은 ‘모호한 판결’이었다.

박씨는 재판에서 승소한 후 신영동 쪽방과 병원을 오가며 투병생활을 계속했다. 승리는 했지만 남은 것은 빚더미와 폐인이 된 몸뿐이었다. 박씨가 2000년 4월 29일 57년의 한많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생업전선, 투병생활, 환경운동의 끈을 놓지 않게 지원한 환경운동가는 신영식(만화가, 2006년 작고)·오진희(동화작가) 부부와 조수자(현 ‘함께 사는 길’ 사진에디터) 등이다.

秘錄환경운동25년

민들레는 갓털이 있어 먼 곳까지 씨앗을 전파하는 식물이다. 그래서 검은 폐를 싸안고 환경운동의 씨를 뿌리고 간 박씨를 사람들은 ‘검은 민들레’라고 불렀다.

<신동호 편집위원 hudy@kyunghyang.com>